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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구지봉, 수로왕비릉, 김해향교

 

김해건설공고 매화를 보고 국립김해박물관까지 둘러보았습니다. 수로왕 만나러 가봅니다. 김해 김 씨의 시조 수로왕 맞습니다. 수로왕릉을 가기 전에 수로왕비릉을 먼저 둘러보려 합니다. 두 릉이 같이 있지 않고 꽤 떨어져 있습니다. 박물관과 가까운 수로왕비릉, 구지봉, 향교 등을 함께 소개합니다.

 

 

국립김해박물관 나와서 우회전하면 수로왕비릉으로 갈 수 있습니다. 거리가 가깝습니다. 넉넉잡고 걸어서 10분이면 갑니다. 이정표에는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이 같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둘은 떨어져 있습니다. 수로왕비릉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가야 합니다. 이정표 수정해야겠습니다.

 

 

 

 

 

 

수로왕비릉 가기 전 구지봉(龜旨峰)을 만납니다. 국립김해박물관 뒤편입니다. 주변이 공원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구지봉은 서기 42년 수로왕이 탄강(誕降)한 곳입니다. 구릉이 모양이 거북이와 닮았다고 해서 구수봉(龜首峰), 구봉(龜峰) 등으로도 불립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의 탄강 설화가 전해집니다.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구간(九干, 가야국 초기의 9명의 추장)과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고 춤을 추었답니다. 하늘에서 보라색 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왔고요. 상자에는 6개의 황금알이 들었고, 알을 깨고 나온 분들이 6개의 가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수로는 6개의 알 중에서 가장 먼저 깨어났다는 뜻입니다. 수로왕은 태어난 지 10여 일 만에 장성하여 가락국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김해 김 씨의 시조가 된 것이고요. 정상에는 기원전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남방식 지석묘(고인돌)가 있습니다. 지석묘 상석에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한석봉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고인돌이 있는 줄 나중에 알았습니다. 구지봉 밑에서만 보고 넘어갔네요. 

 

 

 

 

 

 

 

 

구지터널을 지나면 바로 수로왕비릉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구지봉을 맥을 끊기 위해 이곳에 도로를 만듭니다. 구지봉은 거북이 형상이고 도로를 만들면서 목 부분을 잘라낸 것입니다. 나중에 터널을 만들고 위를 연결합니다.

 

 

 

 

 

이곳이 바로 수로왕비릉입니다. 사적 제74호입니다. 관람료는 없습니다. 개방시간은 계절마다 다릅니다. 3월부터 10월까지 하절기에는 8시에 오픈입니다. 3월과 10월은 7시까지, 4월부터 9월까지는 8시까지 개방합니다. 11월부터 2월까지 동절기는 9시 오픈 6시 마감입니다.

 

 

 

 

 

수로왕비릉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건물이 있습니다. 건물 이름은 숭보재. 들어가는 문에는 돈종문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숭보재는 릉의 관리사무소 성격의 건물입니다. 일반인은 출입금지네요.

 

 

 

 

 

수로왕비릉 앞에 독특한 석탑이 있습니다. 파사석탑(婆娑石塔)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서 왔느냐? 수로왕비 스토리와 관련 있습니다. 수로왕비의 이름은 허황옥(許黃玉)입니다.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 공주입니다.

 

서기 48년(수로왕 7)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싣고 왔다고 전해집니다. 해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갖고 온 돌이라는 것입니다. 파도를 진정시켜주는 돌이라 해서 진풍탑(鎭風塔)이라고도 불립니다. 돌을 정밀하게 조사해보니, 우리나라에는 없고 인도에 있는 돌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형태를 갖고 있는 탑입니다. 붉은빛을 띠는 것이 보입니다. 신농본초(한의학 책)에 파사석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파사석탑과 일반 돌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실험을 합니다. 닭 볏의 피를 돌에 뿌립니다. 파사석탑은 물기가 남아 있고 일반 돌은 금방 말라버렸답니다. 최근에 김해의 어느 향토사학자가 비슷한 실험을 했는데, 책 그대로 결과가 나왔다는군요.

 

이 탑이 처음부터 수로왕비릉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호계사라는 절에 있었습니다. 1873년 절이 폐사되자 탑을 수로왕비릉 가까이로 옮겨옵니다. 이후 1993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보호각을 짓고 보호하고 있습니다.

 

 

 

 

 

수로왕비릉입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았습니다. 단아합니다. 릉 뒤로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가락국까지 어떻게 알고 시집을 오려했을까 궁금합니다.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 살고 있을 때 허황옥의 부모의 꿈에 옥황상제가 나왔답니다. 옥황상제는 가락국의 왕에게 시집을 가라 했답니다. 인도에서 배를 타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파도가 높아서 인도로 되돌아갑니다. 이때 해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파사석탑을 배에 싣게 되었고 가락국까지 무사히 오게 됩니다. 

 

가락국에 오니 수로왕이 마중을 나와 있었답니다.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갑니다. 자신이 입고 온 비단 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습니다. 왕과 왕비는 두 밤 한 나절의 첫날밤을 보냈답니다. 이후 수로왕비는 서기 187년 그러니까 157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만남으로 490년 가락국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수로왕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었답니다. 이 중에서 둘째와 셋째 아들에게 어머니의 성인 허 씨 성을 따르게 하였답니다. 그래서 김 씨와 허 씨는 결혼하지 않는 불문율 같은 게 있다고 하는군요.

 

 

 

 

 

수로왕비릉 앞에 약수터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연신 물을 떠가고 있었습니다. 저도 마셔보았는데 물맛이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던데. 관광안내도를 보니 구산동 고분군이 멀지 않아서 가보려 했는데 방향을 못 찾겠더군요. 그래서 수로왕릉으로 갑니다.

 

 

 

 

 

수로왕비릉에서 수로왕릉까지 걸어갑니다. 30분 정도 걸렸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생각보다 멀어서, 살짝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거리 걷는 기분은 좋습니다. 이날 날씨가 참 포근하니 좋았거든요. 김해가 서울 쪽보다는 따뜻했습니다. 이정표에 향교, 수로왕릉이 보입니다.

 

 

 

 

 

향교가 김해에만 있는 것도 아니기에 스쳐 지나가려 했습니다. 그래도 김해향교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찾아가 봤습니다. 향교는 조선시대 국공립 중고등학교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향교가 329개소가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231개소입니다. 김해향교는 1408년(태종 8)에 창건하였습니다. 이후 화재를 겪으면서 이전을 하였고 1770년(영조 46)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왔습니다. 

 

 

 

 

향교는 2가지 기능을 합니다. 교육과 제사. 유교에 관해서 교육을 했고요. 유교가 지배하던 때이니 공자, 맹자 등 성현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김해향교는 교육공간을 앞쪽에 제례 공간을 뒤쪽에 두는 공간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를 전학후묘(前學後廟)라고 하며 가장 일반적인 향교의 모습입니다.

 

 

 

 

 

 

가락국 가야의 시작은 수로왕부터입니다. 수로왕 혼자만의 힘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가야의 시작이 되는 곳인 구지봉까지 포스팅하면서 가야의 역사를 공부해보니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놓치고 온 부분이나 좀 더 세심하게 봐야 할 부분도 보이고요. 가야로의 여행길을 다시금 준비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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