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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를 찾았습니다. 길상사는 무소유 법정 스님을 뵐 수 있는 곳입니다. 스님이 입적하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스님이 향기는 길상사에 남아 있습니다. 오랜만에 성북동까지 왔는데, 길상사만 보고 갈 수는 없습니다. 심우장까지 이어 가 보려고 합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무르셨던 곳입니다.

 

 

길상사에서 심우장까지 가는 길을 검색해 보니 걸어서 20분 정도면 갈 수 있겠더군요. 길상사에서 나와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북악슈퍼에서 골목길로 접어듭니다. 심우장 이정표가 있어서 길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심우장으로 향합니다. 그러다 한국인문사회연구원 부근에서 길을 잃어 돌아가야 했습니다.

 

 

 

 

 

 

 

성북동 일대를 거닐다 보니 언덕 위로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북동, 평창동 일대는 부촌입니다. 드라마에서 전화받으면서 '여기 성북동인데' 이런 식으로 동네 이름을 얘기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성북동을 거닐다 보니 부촌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1960년대까지는 소위 권력 있는 사람들이 성북동에 많이 살았답니다. 1970년대 대기업 일가가 성북동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성북동이 대를 이어 부를 누릴 터라고 적고 있습니다. 진짜 부촌은 강남이 아니고 성북동, 평창동 일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골목골목을 누빈 끝에 심우장 1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발견합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심우장입니다. 계단을 오르기 전 길가에 한용운 선생과 님의 침묵 시비가 있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 님의 침묵을 읽고 심우장으로 향합니다.

 

 

 

 

 

 

 

심우장으로 향하는 계단

 

 

 

 

 

한용운 선생은1 독립만세운동 때 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일제에 붙잡혀 구속됩니다. 재판받을 때 재판관에서 남긴 말이 남아 있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기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재판관 : 피고는 이번 계획으로 처벌될 줄 알았는가?
한용운 :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리 없을 줄 안다.
재판관 :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한용운 :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심우장에 도착했습니다. 보통의 집 대문과 비슷합니다. 대문에는 심우장 관람과 관련한 사항이 적혀 있습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문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심우장이 있고, 오른쪽 POST에 스탬프가 있습니다. 마음껏 사진 찍을 수 있습니다. 별도의 관람료는 없습니다.

 

 

 

 

 

 

 

보통의 집이 햇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지어지는데, 반대로 심우장은 북향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쪽이 조선총독부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한용운 선생은 조선총독부와 등지기 위해 북향으로 지은 것입니다.

 

 

 

 

 

한용운 선생의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심우장(尋牛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심우장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소를 찾는 집입니다. 불교에서는 소가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심우라는 것은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심우장이란 글씨는 한용운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했던 서예가 오세창 선생이 쓴 것입니다.

 

 

 

 

 

북향이기 때문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집이었답니다. 자연적 조건으로만 보면 살기 좋은 집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한용운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독립 의지를 품고 이 집에서 사셨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애, 심우장

 

한용운 선생은 187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홍성에 가면 생가가 있습니다. 14세에 결혼하였고, 16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27세 백담사에 들어가 정식으로 득도합니다. 41세 때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립니다. 평생을 민족운동과 불교계 혁신에 매진하셨습니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심우장에서 입적하셨습니다.

 

 

 

 

 

 

심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시집, 신문 기사, 잡지 등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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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선생의 글씨로 전대법륜(轉大法輪)을 볼 수 있습니다. 큰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설법하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첫째 불법도 중생의 번뇌와 죄업을 모두 깨뜨려 사라지게 만든다. 불법은 누구에게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돌아간다. 불법 또한 어느 곳에 치우치지 않고 원만 무결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님의 침묵을 천천히 읽어봅니다. 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시이기에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참고서에는 님의 침묵에 대한 해석이 장황하게 나옵니다. 님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조국, 민족, 부처님, 연인 등. 님의 침묵은 이별하고 슬픔을 겪고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심우장에서 님의 침묵을 적어 내려가는 한용운 선생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심우장 앞에 앉아 마당을 바라봅니다. 한용운 선생은 마당을 거닐면서 나라를 걱정하고 작품을 구상 하셨겠죠? 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한용운 선생을 따라는 많은 이들이 심우장을 찾았을 것입니다.

 

한용운 선생은 심우장에서 딸을 낳은 후 호적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만든 호적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딸에게 직접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나라에서 주는 식량 배급도 거부합니다. 일제가 주는 것은 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독립선언문을 쓴 최남선이 친일로 변절했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최남선이라는 사람은 이미 장례를 치르기에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봅니다.

 

 

 

 

 

 

 

'사랑하는 까닭' 시를 읽어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지 생각합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입적하기 전까지 생활하셨던 심우장을 찾았습니다. 일제강점기는 굴곡진 우리의 역사입니다. 지식인들이 편하게 살려고만 하면 세상 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일파로 변절한 이들이 많은 것이고요. 심우장을 다녀오면서 만해 한용운 선생의 곧은 절개와 기개를 조금이라도 담아보았습니다. 한용운 선생이야말로 시대의 참 위인입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서, 1111번, 2112번 버스를 타면 됩니다. 근처에 성북미술관, 간송미술관 등도 함께 둘러보면 좋습니다. 코로나 19로 개관 여부는 확인해보셔야 하고요. 걸어서 길상사 가는 것도 좋고요. 한성대입구역 나폴레옹 제과점, 성북동 국시집 칼국수도 가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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