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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제주박물관

제주도에 온 관광객들은 제주도의 겉모습만 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우리가 잘 모르는 제주도만의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제주도의 역사를 만납니다.

 

함덕해수욕장에서 버스 타고 제주 시내로 가는 중입니다. 노선도를 보니 국립제주박물관을 지나갑니다. 제주도에서 많은 시간 보냈는데 국립제주박물관 관람을 안 했더군요. 깊이 반성합니다. 박물관에서 제주도 역사를 공부해야겠습니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혼저옵서예'라고 환영의 인사말이 보입니다. 어서오세요라는 뜻의 제주어입니다. 제주어는 바람이 강해서 말이 강하고 빠릅니다. 제주어는 중세국어의 특징이 남아 있습니다. ㆍ(아래아) 발음을 제대로 하는 제주도 친구들이 있습니다. 돌하르방이라면 사진 속의 모습을 떠올리시겠지만 지역에 따라 모양이 다릅니다.




제주도는 화산섬입니다. 현무암으로 대표되는 화산석이 많습니다. 밭을 일구며 나온 돌을 이용해 돌담을 쌓습니다. 돌담은 구역을 나누기도 하고 바람을 막기도 합니다. 문에는 정낭을 만듭니다. 3가지 막대의 상태에 따라 집안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3개가 나란히 걸려 있으면 멀리 출타 중이라는 뜻입니다.








박물관에서는 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문화유적을 통해 제주도를 바라봅니다.

제주도는 18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4만 년 전 빙하기 때는 육지와 연결되었습니다. 애월읍 빌레못동굴에서는 북반구에 사는 동물의 뼈가 발견되었습니다. 2.5만 년 전후로 한반도 구석기 문화가 제주도에 들어옵니다.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바다의 수면이 높아지면서 제주는 ‘섬’이 되었습니다. 한반도 남해안과 교류가 이루어지며 신석기 문화가 들어옵니다. 이후 제주도 전역에서 신석기 문화 유적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산리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이 있습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도 종종 등장하는 고산리 유적입니다.




로봇이 돌아다니면서 안내합니다.






제주도는 기후가 따뜻해서 사냥과 채집을 위해 멀리 이동하지 않고 주변에서 쉽게 음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신석기 유적지에서 갈돌, 갈판 등의 생활도구, 낚시도구, 해산물 채취도구 등이 발견됩니다. 물고기 뼈도 남아 있습니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제주도에도 청동기 문화가 들어옵니다.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였고, 조개껍질을 이용하여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마을의 규모도 커집니다. 제주시 삼양동, 용담동, 외도동에서는 100여 기 이상의 집터가 있는 마을이 발견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제주도만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집의 규모가 작아지고 마을 사람들의 생활방식도 점차 바뀝니다. 나무를 가공해서 집을 짓고, 조개껍질을 이용하여 생활도구를 만듭니다.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를 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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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탐라국이라 불렸습니다. 탐(耽)은 섬을 뜻하고, 라(羅)는 나라를 뜻합니다. 탐라국은 작은 지배 세력들이 합쳐져 큰 집단을 이룬 것입니다. 강력한 지배계층이 있었고 섬 전체가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발전합니다. 탐라 후기에는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합니다. 백제, 신라, 왜, 당 등과 교류하며 국제적인 역량을 높였습니다.




'탐라'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476년 탐라에서 백제에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에 '주호'라고 나옵니다.




애월읍 곽지리 조개무지 유적은 탐라 전기를 대표하는 유적입니다. 제주도 곳곳에서 곽지리식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발견됩니다. 이를 통해 탐라의 결속력이 강하였고, 같은 문화권 안에서 성장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탐라는 주변 지역과의 해상교류로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입니자. 철기, 유리구슬, 옥제품 등이 탐라에 들어옵니다. 탐라에서 만들어진 생활용기가 남해안 지역으로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구좌읍 종달리에서는 남해안 지역에서 들여온 토기와 철기 여러 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제주시 용담동에서는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한 의례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고려는 탐라국을 인정하여 성주의 작위를 내리고 간접적으로 지배하였습니다. 1105년에는 탐라국을 고려의 행정구역인 군에 포함하면서 탐라군이 되었고, 탐라는 나라의 지위를 잃게 되었습니다. 1295년에는 탐라라는 이름 대신 바다 건너 고을이라는 뜻의 제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한경면 신창리 해저에서 중국 청자, 금팔지, 금뒤꽂이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출토된 청자들은 중국 남송 용천요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으로 가는 무역선이 제주 해안에서 난파되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제주도에 중국 송과 일본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제주는 동아시아 해상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제주에서 불교가 융성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고려사에는 1034년 개경에서 열린 팔관회에 탐라의 사신이 참석하였고, 1057년에 육지의 사찰 창건에 탐라 사람들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법화사 터에서 고려청자와 다양한 기와, 중국 도자기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밖에 원당사 터 5층 석탑, 수정사 터 석탑 부재, 조자암 터 출토품 등은 제주의 불교문화를 잘 보여줍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몽골에 대항하였습니다. 제주도로 이동하여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김통정 장군을 중심으로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항전합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삼별초와 뜻을 같이하여 대몽항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습니다. 삼별초는 1273년 여몽연합군에 항복합니다. 원은 삼별초를 평정한 후 일본 원정에 대비하여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파견합니다.




항파두리성 내성 터에서 철갑옷이 출토되었습니다. 전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의 미늘 갑옷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제주도를 살펴봅니다. 위 지도는 한라장촉입니다. 한라장촉은 탐라순력도 첫 장으로 제주도와 주변 지형이 그려진 지도입니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화공 김남길을 시켜 제작한 기록화첩입니다. 이형상이 실시한 가을 순력과 제주도에서 치른 다양한 행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도의 위쪽이 남쪽이고 아래쪽이 북쪽입니다. 동쪽이 좌면, 서쪽이 우면입니다. 한양에 있는 임금이 내려다보는 방향에서 그렸기 때문입니다. 제주의 오름과 마을 이름을 비롯하여 방어 시설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탐라지도병서 1709년 그림




제주속오군적부








1694년 이익태가 제주목사로 임명될 때 받은 교지입니다. 제주목에는 수령(정 3품)이 파견되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장급입니다. 제주목사를 보좌하는 관리로 판관(종 5품)이 함께 부임하였습니다.




제주목사는 대정현, 정의현을 감독하는 전라도 관찰사의 임무, 왜구의 침입 대비 등의 임무를 맡았기에 다른 수령보다 권한이 많았습니다. 왜구를 막기 위해 읍성을 쌓고 방어진을 두었습니다. 왜구를 감시하고 횃불과 연기로 위급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봉수와 연대도 설치하였습니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에 향교를 만들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사학으로 귤림서원, 삼천서당, 우학당, 좌학당 등이 세워져 제주 유학 교육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주인의 문과, 무과, 향시는 전라도에서 치러졌습니다. 중앙에서 별견어사를 제주도에 내려보내 별시를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여비고에 나온 제주도




해난 사고가 많은 제주도에서는 바람을 잘못 만나 중국 명, 청, 왜, 류큐(오키나와), 타이완, 여송(필리핀), 안남(베트남)까지 표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바다로 나가 표류하면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지만 생사의 위기를 극복하고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은 표류 기간에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대표적으로 표해록이 있습니다.




1653년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은 항해 중 제주에 표착했다가 조선에 13년간 억류되었습니다. 하멜표류기는 유럽에 조선을 소개한 최초의 기록입니다. 하멜은 제주도를 '퀼파트'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퀼파트는 1642년경 제주도 근처를 항해했던 퀼파트 드 브락이란 배의 이름을 딴 것으로 서양에서 제주도를 칭하던 이름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사화와 당쟁이 심해지면서 많은 정치인이 제주로 유배를 왔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엄격히 제한되었지만 성리학적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로서 후학을 양성하며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김정희는 제주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제주의 학문과 예술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완당(김정희) 선생상




조선 후기 성리학의 거두 송시열은 83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 왔습니다.




위 사진 속 그림은 탐라순력도에 있는 것으로서 귤과 관련 있습니다. 왼쪽은 '고원방고'입니다. 진상하기 위해 귤을 기르던 고둔과원을 그렸습니다. 오른쪽은 '감귤봉진'입니다. 감귤을 진상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귤은 제주도에서만 재배되었고 겨울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특별한 과일이었습니다. 제주에 부임한 관리는 감귤나무 수를 일일이 기록하고 수확물을 모두 거두어 한양으로 보냈습니다. 감귤을 운반할 때에는 짓눌려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짚단으로 싼 후 나무통에 넣어서 보냈습니다. 귀한 제주 감귤은 왕이나 높은 관직의 사람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전복, 바닷말, 거북 껍데기, 말, 귤, 표고버섯, 미역 등은 제주도의 귀한 특산물입니다. 조선시대는 공납이라 하여 특산물을 진상해야 합니다. 공납품의 관리와 운반은 제주목사의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제주인은 제주의 특산물과 쌀, 소금 등 생필품을 교환하며 살아갔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공납의 수량은 계속 늘어나고 생필품 얻기는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척박한 환경, 자연재해, 왜구침입, 관리들의 폐해, 제주 토호 세력의 수탈까지 겹쳐 삶의 어려움은 더해졌습니다. 제주도에서 육지로 도망가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1629년 조선 정부는 제주인의 섬 밖 이동을 금지합니다. 출륙금지령은 200여 년 동안 지속됩니다. 제주의 경제와 문화 발전을 더디게 하였습니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척박하고 힘겨운 생존의 공간이었습니다. 농사짓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는 열린 섬으로 여러 문화가 들어오기도 하였고, 고립된 섬으로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주도는 우뚝 솟은 한라산, 수백 개의 오름, 곶자왈의 푸름으로 덮여 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섬입니다. 약하게 부는 바람(지름새)에서 예기치 못하게 강하게 변하는 바람(궁근새)처럼 고요한 삶의 터전이자 격한 시련의 공간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주도에는 있습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박물관에 적힌 설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제주도의 자연과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제주라는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를 알고 풍경을 바라보면 제주도가 더욱더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제주 여행길에 박물관 구경도 해보시길 바랍니다. 제주의 내면에 조금이나마 가깝게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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