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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인각사

국사 수업 시간 특히 에 고대 삼국시대 배울 때 꼭 등장하는 책 2권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 중에서 삼국유사의 흔적을 찾아 경상북도 군위군으로 향합니다. 일연 스님이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합니다.

인각사는 643년(선덕여왕 11)에 의상대사가 창건했습니다. 어떤 자료에서는 원효가 세운 절이고 언제 창건했는지 알 수 없다고도 나옵니다.

인각(麟角)을 직역하면 기린뿔입니다. 기린이라고 해서 목이 긴 동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양에서 기린은 상상 속 동물입니다. 인각사라는 이름을 가진 몇 가지 썰이 있습니다. 인각사 있는 산이 기린을 닮았고 명부전 뒤로 내려오는 산세가 뿔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학소대에서 기린이 놀다가 떨어져 뿔이 빠졌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학소대에 기린이 뿔을 얹었다고도 합니다.




인각사지 안내도




조선 전기까지는 이름있는 절이었으나 정유재란 이후 폐사 상태였습니다. 이후 명맥만 유지하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보수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삼국유사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정비 중입니다. 고찰의 느낌은 나지 않습니다. 여름날 인각사 경내에 여행자는 저 혼자입니다. 강아지가 낯선 여행자를 반겨줍니다. 강아지도 더운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습니다.








발굴조사를 해보니 부재도 많이 나오고 커다란 건물터도 나왔다고 합니다. 평범한 절이 아니고 상당히 사이즈가 있는 절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신라 시대 인각사 주변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가였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조용한 모습과는 달랐겠습니다.




발굴조사 때 나온 유물은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금동병향로, 청동향합, 청동반자, 청동그릇, 청동정병, 청동이중합 등 예사롭지 않은 유물입니다. 유물들은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확실히 인각사가 보통의 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경내에 들어와서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극락전입니다. 극락전은 인각사의 중심 역할을 합니다. 극락전은 붕괴 위험까지 갔습니다. 최근에 해체 보수하였습니다. 극락전 안에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아미타삼존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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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앞에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1층 기단부가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세웠습니다. 신라시대 탑 양식을 기초로 하고 고려시대 전기의 모습이 더해졌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극락전




산령각








국사전




인각사의 대표적 유적인 보각국사비입니다. 지금은 깨어져 본모습을 짐작하기 힘듭니다. 보각국사가 일연 스님입니다. 스님 열반 후 스님의 평생 발자취를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비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1295년(충렬왕 21) 비를 세웠습니다.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당대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왕희지의 글씨를 탐낸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탁본해가면서 훼손이 심해졌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파손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다행히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남아있습니다.




보조국사비첩








보각국사 탑

보각국사 일연 스님의 사리탑입니다. 스님이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해가 뜰 때 탑에서 광채가 나와 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합니다. 탑신부에 보각구사정조지탑이라 쓰여 있습니다. 본래 인각사에서 2㎞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몇 차례 이전하였다가 1978년 현재 위치로 왔습니다. 인각사 보각국사 탑과 비를 묶어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탑 옆에 있는 석불좌상이 있습니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합니다. 높이 153㎝. 광배와 불상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줍니다.




일연스님(1206~1289)을 만납니다. 스님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활동하였으며 보각국사(普覺國師)라고도 합니다. 9살부터 불교 공부를 시작합니다. 54세에 선종의 최고 승계인 대선사(大禪師)에 오릅니다. 전국의 여러 사찰을 다니며 법회도 열고 절 창건도 하고요. 왕과도 가깝게 지냈고요.

국사가 된 일연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물러날 것을 청합니다. 인각사를 하산소(下山所)로 정하여 내려와 머물게 됩니다. 이에 충렬왕은 인각사를 중수하게 하고, 전답 100여 결을 하사합니다. 인각사에서 일연은 선종 승려들을 크게 모아서 법회를 열기도 하였고 많은 승려가 일연 스님 제자로 들어옵니다.








삼국유사는 활자본으로 5권 2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정확한 편찬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281~1283년 사이에 편찬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시기는 스님이 76세 되던 해입니다. 딱 76세 때부터 쓴 것이라기보다 그전부터 꾸준히 자료 수집을 해왔고 인각사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고려시대 초판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 이계복에 의해 중간된 정덕본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여러 사관에 이루어진 정사를 기록한 것으로 정제된 형태입니다.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 혼자 쓴 야사입니다.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고조선과 단군신화에 관한 내용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굴욕을 당하던 시기였습니다. 스님은 우리의 민족자주의식을 깨우쳐 주기 위해 삼국유사를 집필 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극락전 뒤로 가면 인각사지가 이어집니다. 전각은 없고 들꽃과 풀이 가득합니다. 여기까지 인각사였다면 정말 큰 절이었겠습니다. 커다란 비석은 '보조국사 재현비명' 입니다. 2006년 일연스님 탄생 800주년을 맞아 보조국사비를 재현했습니다.




인각사 부도. 산기슭에 있던 것을 옮겨왔습니다.








인각사에서 길을 건너면 거대한 절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학들이 둥지를 틀고 서식했다 하여 학소대라 불립니다. 학소대 보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풍경입니다. 크기도 크기지만 절벽의 생김새가 범상치 않습니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이 찾았다고 전해집니다. 학소대 앞에 있으면 시상이 저절로 떠올랐겠습니다.




학소대 앞은 캠핑 장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고장답게 동네 이름도 바꾸었습니다. 고로면에서 삼국유사면으로



군위는 대구 북쪽에 있습니다. 군위는 삼국유사를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이름으로 축제도 열고 삼국유사테마파크도 만들었습니다. 인각사가 사람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위치는 아닌데 그렇게 큰 절이 만들어졌을지도 궁금합니다. 좋은 기운이 흐르는 곳이었겠죠. 그래서 일연 스님이 자리 잡고 삼국유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으리라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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