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창내리묵집
모처럼 쉬는 날 늦잠 좀 자고 일어나니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밥 먹기는 뭔가 아쉽고 화창한 5월의 봄날도 만끽할 겸 부모님과 함께 나가서 밥을 먹기로 합니다.
어머니께서 이 치료를 하고 있으셔서 고기 종류는 안 됩니다. 채식 위주의 한정식집을 가려했는데 때가 때인지라 자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묵 먹으러 갑니다. 수소문해서 찾아낸 곳은 평택 창내리묵집. 어느 시골의 간판도 없는 아는 사람만 간다는 그런 묵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발합니다.
매월 첫째 주 일요일은 영업을 안 한다는 글을 보고 포기했습니다. 그래도 몰라 전화를 해보니 오후 3시까지만 장사한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 후다닥 달려갑니다. 내비게이션에도 안 나올 수 있으니 주소를 입력해서 가라고 하더군요.
경기도 평택시 오성면 창내리 20-59
평택 시내에서 안중 쪽으로 이어지는 큰길은 시원스럽게 잘 달렸는데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리저리 꼬불꼬불 방향을 틀게 됩니다. 주위에는 모내기하기 위해 물 받아 놓은 논만 보입니다. 이런데 밥집이 있긴 있는 거야? 하는 의구심만 생깁니다. 그렇게 차를 몰고 가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옵니다. 창내 4리 다목적회관과 놀이터와 사진 속의 현수막이 보입니다.
KBS, SBS 등 주요 방송에 등장했다는 낡은 현수막을 뒤로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갑니다. '묵집'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빨간색으로 쓰여 있어서 좀 섬뜩하기도 했지만 '묵집' 글씨가 없으면 여기가 식당인지 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저 문에서 포스 있는 젊은 여자분이 나오더니 뒤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밥 다 먹고 나올 때 문 안쪽을 보니 묵을 직접 만들기 위한 기구들이 있습니다. 문 앞 다라이에는 미꾸라지, 우렁 등이 있고요. 묵을 쑨 지 40년이 되었다는군요. 그것도 손으로 직접.
그렇게 돌아가니 식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입춘이 지나고 입하가 되었지만 여전히 붙어 있는 입춘대길. 오른쪽에 걸린 '관인후덕'이라는 글씨가 인상적입니다. 관인후덕(寬仁厚德)은 어짐을 너그럽게 베풀고 덕을 후하게 쌓으라는 뜻입니다. 이 식당과 관인후덕이 무슨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배부르게 먹고 온 것은 사실입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포스 넘치는 여자분이 몇 명인지를 물어보고 안 쪽 방으로 가라 합니다. 들어갈 때 물 병 하나를 쥐어주네요. 물은 셀프니까. 그리고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주문받습니다. 우리는 먼저 묵밥을 주문합니다. 그래서 들어온 어느 방. 자개장이 떡 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요즘 여느 식당에서 봤음직한 화려하고 깔끔한 인테리어 하고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릅니다. 밥상만 치우면 바로 잠자리에 들어도 될 것 같은 시골 외갓집에 찾아간 분위기입니다.
벽에는 메뉴가 걸려 있습니다. 메뉴판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묵밥만 먹기는 뭔가 아쉬워서 서브메뉴를 골라봅니다. 묵집에 왔으니 묵무침을 주문합니다. 거기에 동동주까지. 돼지수육과 막국수 옆에는 자그마한 글씨로 '30분 전 예약'이라고 돼있습니다. 막국수는 여름에만 된다는군요. 염소고기가 눈에 띕니다. 다음에 몸보신하러 와야겠습니다.
기본 반찬은 4가지가 나왔습니다. 취나물, 열무김치, 파김치, 배추김치. 배추김치는 물에 헹군 거 같더군요. 반찬이 옛날맛이 난다고 하는 말이 정확할 듯합니다. 그렇게 간이 세지 않은 것이 제 입맛에 맞습니다. 묵밥과도 잘 어울립니다. 반찬은 계절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고 합니다.
오늘의 메인 묵밥이 등장합니다. 뜨뜻합니다. 여름에는 차갑게 나온다고도 하더군요. 도토리묵과 청포묵(?)이 비슷한 비율로 담겨있고 김치가 송송송 고명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참기름 향도 적절히 나는 것이 구미를 당깁니다.
조가 조금 섞인 밥은 따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3명 분량입니다.
밥을 말아서 본격적으로 흡입 시작합니다. 제가 묵을 좋아해서 여기저기서 먹어봤는데. 지금까지 먹어 본 묵밥 중에 오늘이 제일 맛있습니다. 묵도 탱탱하고 구수하고 좋습니다. 특히나 입맛 까다로운 우리 이 여사님 입맛에도 맛이 괜찮다면서 묵밥 한 그릇을 다 드시네요. 평소에 밥을 그렇게 많이 드시는 분이 아닌데 말이죠.
페트병에 동동주가 담겨 나옵니다. 집에서 직접 만든 밀주 느낌입니다. 잔에 따르고 향을 맡아보는데 술기운이 팍 하고 올라옵니다. 제대로 된 동동주입니다. 이거 맛있어서 한잔 두 잔 먹다 보면 소리 없이 가겠더라고요. 아버지만 두 잔 정도 드시고 남은 동동주는 집으로 갖고 왔습니다.
묵무침 나옵니다. 오이, 부추, 양파와 묵이 적당히 매운 양념과 잘 어울립니다. 정말 차만 없으면 동동주에 묵무침 맘껏 먹고 싶었습니다. 다 먹고 나가는데 주방이 보입니다. 가만 보니 주방에서 음식 하는 분이 어머니이신가 봅니다. 아까 음식 주문받고 서빙하던 분은 따님이시고요.
각종 방송에 나온 모습. 생생정보통 오군도 왔다 갔군요.
매월 첫째 주 일요일은 휴무이고요. 계절별로 판매하는 음식이 다릅니다. 돼지보쌈 같은 음식은 사전에 예약을 해야지만 먹을 수 있습니다. 미꾸라지는 직접 잡은 것만으로 한다고 하니 더욱 믿음이 가네요. 식당 앞 다라이에 있던 미꾸라지가 그 미꾸라지인가 봅니다.
'묵'이라는 음식이 화려한 음식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야 먹을 수 있는 소중한 음식입니다. 평택 창내리묵집의 묵은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입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히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방송에 나오고 유명세를 치르면 간판도 올리고 인테리어도 바꾸고 식당도 넓힐 법도 합니다. 창내리 묵집은 묵묵히 묵을 쑤고, 음식을 내오고 있는 곳입니다. 음식에 대한 진심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오랜만에 진심 어린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기분 좋은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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