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송탄 지역 지명 유래

평택,안성 2011. 1. 30. 18:14 Posted by 라오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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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평마을 : 조선 중기에 형성되고 갈대가 무성하고 넓은 평야가 있다하여 갈평이라 하였다. 옛적부터 큰강이 마을을 통하고 있었다고하나 그 흔적이 없어 전해지는 이야기로만 남아 있다.
[문화 유적:이 괄의 난 때 이 괄이 먹었던 우물]

건지(乾芝)마을 : 약 450년 전 형성된 마을로서 지산천(芝山川)을 경계로하여 동북은 양달말, 서남은 응달말로 불렀고 양달말 뒷산 너머에는 큰 북어울, 작은 북어울이라 불리는 습지대가 있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 곳은 옛적에 큰 내가 흐르고 북어가 잡히어 말리던 곳이어서 건지라고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을이 떼가 마를 정도로 건조하여서 건지라 했다고도 한다.
[문화 유적:지명설화, 용호 약수터, 장군 약수터]

구장(舊場)터마을 : 조선 때 진위현의 장터가 있었다고 전하며 일정 때 면 소재지가 되기도 하였던 마을로 진위천을 낀 현재 송탄 북쪽 서탄면 경계에 위치한 기름 졌던 마을이다.

광귀(廣歸)마을 : 대략 1960년경에 광천 부락 뒤편으로 귀 농민 20여 세대가 정착하였으며 당시 광천 마을에서 분리 되면서 광자를 따고 귀농의 귀자를 따서 광귀라 하였다.

광천(廣川)마을 : 마을 앞에 넓은 내가 흐르고 돛단배가 왕래 하였다하며 이를 인하여 광천이라 하였다. 원장당에서 갈라진 마을이다.
[문화 유적:엄나무(수령405년,높이18m,둘레7m)]

남산터 마을 : 마을의 유래는 제역마을의 일원과 같다고 할 수 있으며 원산(猿山)이라는 산이 있어 그 명칭의 변형으로 남산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추정을 할 뿐으로 남산터란 말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내리(內里)마을 : 도일리 가운데 마을이란 뜻으로 내리라 하였고 석비, 운터 말, 새말, 깊은 골, 능말, 갓골, 안말등의 골짝으로 형성 되었다.
[문화 유적:원균 묘(도 지정 문화재), 옷 우물 샘, 숫돌 고개, 석자의 묘, 약천사]

동령(東嶺)마을 : 동령 마을에 대하여는 1759년경 간행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당신 진위현 송장면 동령리로서 그 이전 송장현 이었을 때 현의 현치소(군 주둔지)가 동령에 있고 토성이 있었다 하는데 이 토성은 고려 초기때부터 전략 요충지로 써 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잔해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마을 이름은 동쪽으로 재가 있어 동령(東嶺)이라 하였다.
[문화 유적:조광조, 오달제의 유허지비 및 충의각, 우물제사(정월 첫 용 날)]

동막(東幕)마을 : 조선시대에 삼남대로가 지나고 있어서 대로상에 주막이 형성되고 동쪽으로 골짜기 사이에 마을이 이루어지면서 동쪽 막바지에 있다하여 동막이라 불렀다. 진위현 마산면에 속하여 있다가 일정 후 탄현면, 일탄면을 거쳐 송탄면에 소속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 유적:동막 저수지]

막곡(幕谷)마을 : 조선시대에 진위현 여방면에 속했던 이 마을은 원래 방효리(현 방여울)라 했다. 막곡이라 불리는 것은 6.25전란 후 면의 행정 개편시 방 여울을 방혜동, 막곡, 중리로 할 때부터였으나, 막곡이라는 말이 유래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이 곳은 마을 뒤편으로 산이 있는데 그 산의 형세가 흡사 성(城)과 같이 보이고 산을 넘는 고개 길을 성현(城峴), 성재라고 하였으며 그 아래 있는 마을이 군의 막사 같아서 막곡이라 하였다.
[문화 유적:최남순 시혜 불망비]

모곡(茅谷) 마을 : 조선 중기에 형성었되고 광활한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도롱이라는 비옷을 만들 때 쓰는 띠의 재료인 풀이 무성하였다하여 띠모(茅) 골곡(谷)자를 써서 모곡이라고 했다 한다.
[문화 유적:전주 이씨 사당 1간, 향나무 1그루(수령 500년)]

목천(木川)마을 : 옛적에 이 마을 앞으로 커다란 내가 흐르고 이 내는 현 진위천(통상 하북 냇갈)로 흘러 서해로 빠졌다 하며 이 내의 좌우에 나무숲이 무성하고 나무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있어 나무 내라 하였다. 일설로는 홍수 때마다 큰 나무가 떠내려와 주민들이 건져 땔감으로 썼다하며 이로써 나무내란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500년된 마을로 추산 된다.

밀월(蜜月)마을 : 이 마을은 신장 마을에서 사거리 쪽으로 있으며 6.25전란 후 미군 주둔지 앞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무성한 숲이 사거리 쪽으로 우거져 달이 뜨면 그 경관이 수려하여 밀월이라 하였다 전한다. 또한 일설에는 빽빽한 밀(密)을 써서 밀월이라 했다 하는데 이는 가가호호 빽빽이 들어차 번성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다. 그러나 정확한 유래는 찾기 힘들다.

방혜동(方惠洞)마을 : 방혜동 마을은 조선시대에 여방면 방효리(方孝里)로 명기되어 있고 통상 방 여울이라 불렀는데 명칭상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연원은 다른 마을(도원동 하리)로 보아 약4-5 백년 정도 추정되며 방효리가 방혜동으로 변한 것은 일정치하를 견디는 동안 방 여울에서 방여가 방혜로 울이 동을 뜻하므로 일정 시 타지역의 지명도 그들의 마음대로 개편한 것이 한자로 표기함에 방혜동으로 한 것이라 추정된다.

번성(蕃盛)마을 : 1910년경 일제 시대에 풍양 조씨가 정착하여 들을 개간하고 살기 시작한 후에 점차적으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생겼다하며 마을 옆으로 물방앗 간이 있었는데 이곳을 개간한 조씨가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집터가 되어 있다. 마을을 이룬 후 크게 번창하길 바라면서 한자로 번성이라 하였다. 개척자인 조씨의 후손들은 지금도 마을에 4-5호 샇고 있으며 주변으로 퍼져 나가 있다.

복창(福昌) 마을 : 6.25 전란 때에 송탄면에 미군이 상주하게 되고 피난민들 모여들어 야산이었던 이곳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니 당시 면에서 복이 가득하고 창궐이라 하여 복장이라 칭하였는데 일설로는 복창이라는 회사가 있어 그대로 마을을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사거리마을 : 6.25 전란 시 황해도 피난민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사방으로 나뉘어진 길가에 집을 짓고 살아서 사거리라 불렀다.

상가재(上佳才)마을 : 가재 마을에서 위에 있어 상 가재라 하며 가재란 명칭의 유래는 마을의 부락산 줄기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여 산세가 예부터 가재(민물어류)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의 연원은 주민들의 대부분이 광주 이씨로 보아 이들의 정착이 400여 년쯤으로 조선 중기 때 형성 된 것으로 보아진다.
[문화 유적:독립투사 이승익 묘, 풍년나무 전설]

상리(上里)마을 : 내리와 같이 윗동내라하여 상리라 하였으며 사창리(司倉里), 양성골(陽城), 배나무골, 샛골(間谷), 독치골(감나무골), 안골, 산막골(山 谷), 정골(鼎谷)등으로서 형성된 마을이다.
사창리는 조선 영조 때의 자료(1759)에 보면 여방면 사창리로 불렸고 인구 90명의 마을로서 앞에 큰 강이 있고 나루터가 있어 주막과 홍등가가 형성되어 사창리라 했다하며 지금도 닻줄을 묶었다는 느티나무가 있다.
정골(鼎谷)은 옛적에 무쇠솥을 만들었던 마을로 솥정(鼎)을 써서 정골 이라 했다는데 최근까지도 흙 속에서 무쇠 조각이 나왔었다고 한다.
[문화 유적:정골 용광로 터, 양세 충효 정문, 이성부 충절정문, 느티나무(800년), 물푸레나무(400년), 향나무(800년), 모과나무(400년), 400년 초가집 1채, 덕암산 산신각]

석정(石井)마을 : 돌로 된 우물이 있어 석정이라 하고 돌우물 고개가 있으며 조선 시대에 인근 마을 중 물맛이 좋은 3대 우물 중 하나였다.
[문회 유적:돌우물]

서정(西井)마을 : 조선시대에 양성현 서쪽 마을로 맛이 뛰어난 우물이 있어 그 우물을 서우물, 서두물, 서둔물이라 하였고 한자로 서정(西井)이라 하였다.

송월(松月)마을 : 신장과 밀월마을 중간에서 남쪽으로 들에 새로 형성 된 마을로 6.25 후에 지명이 생긴 듯 하며 넓은 들과 송림사이의 달을 지칭하여 송월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유래는 추정하기 힘들다.

송천(松泉)마을 : 고거 읍 당시 지산리(芝山里)에 속하였던 이곳은 탄현동에서 1970년경 분리되고 당시 행정기관인 읍에서 송천이라 하였다.

수촌(水村)마을 : 칠원에서 분리된 마을로 앞에 흐르는 통복천이 유일한 농업 용수 및 식수로 사용 할 때에 그의 중요함을 아는 주민들이 水村이라 하였다. 매년 정월 그믐이면 검은 돼지를 잡아 井제사를 통복천과 수로에서 지내면서 마을의 흥성함을 기원하였었다.

신서(新西)마을 : 서정리 일대에서도 서쪽으로 치우친 조선 말기쯤 형성되어 신서라 하였다.

신선(新鮮)마을 : 조선 중기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되며 구 시청 부근으로서, 6.25 이후에 전입된 인구가 많다.

신리(新里)마을 : 이충 마을 앞에 새로 생겼다 하여 신리라 칭하였다.

신장(新場)마을 : 송탄의 번화가로 현대에 흥성하는 마을로서 예전에 통상 지골, 짓골이라 하였으며 짓골은 제역마을의 줄임말(부르기 쉽게 변형 된)이라 추측 된다. 또한 새로이 시장이 형성(6.25 전후) 되면서 시장 즉 시장이라 칭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연원은 정확히 추측하기 어렵고 해방 이후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본다.

신창(新創)마을 : 6.25 전란 시에 황해도 피난민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면서 황해도 촌으로 불리었는데 면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곳이라 하여 신창이라 칭하였다 한다.

신촌(新村)마을 : 원 칠원과 수촌 사이에서 새로이 형성된 부락이라 하여 부르게 되었다. 원 도일(道日)마을 : 이 마을은 칠원에서 장안리 사이에 도이천을 옆으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원도일, 상하 내리와 더불어 조선 때 여방면의 소속으로 여좌울(월)이라 하였다.
이 마을 전체는 아흔 아홉 골짜기로 되어 있어 인근 방여울(방혜동)을 합쳐서 백여골을 만들어 여방면의 형성을 주도하였다 한다. 옛적 삼남 대로변에 위치하여 주막이 형성 되어 감주(甘酒) 거리라 칭 할 정도로 번창 하였다하니 그 연원이 오래된 것으로 보이나, 도원의 어원을 찾기 힘들다.

신흥(新興)마을 : 현 오좌동의 앞산 등성이를 넘어 새로이 부락 새력을 내린 곳으로 송탄면에서 행정 구획상 오좌동 마을에서 분리하여 신흥(새로 흥하는)마을이라 칭했다. 마을의 토성은 오좌동 마을의 수성 최씨 일문 및 전주 이씨이므로 그 연원은 오좌동 마을과 대동 소이한 것 같다.

장 안(長安)마을 : 조선시대 삼남 대로에서 흰치고개를 넘어 형성된 마을로서 고려 말의 충신인 운암 차원부 선생을 조상으로 하는 연안 차씨가 토성이고 장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유래는 마을의 안녕을 바라고 연안 차씨가 일찍이 살아 왔기 때문에 장안이라고 한 것 같다.
[문화 유적:운암 차원부 묘, 흰치고개, 이용선 시혜비]

점촌(店村)마을 : 1920년 경 이마을에 황금석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가마를 설치하고 좋은 옹기를 구워 팔면서 점(店) 마을이라 불렀다하며 차후 옹기 굽는 이가 많아져 주변의 옹기를 생산해 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점마을은 점촌이라고 표기했는데, 1970년대 들어 서면서 송탄의 주택지로 변모해 산도 깍이고 옹기 가마도 없어져 지금은 점촌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무색하게 되었다. 하지만 향토민의 가정마다 점촌의 옹기들이 옛 숨결을 전해 느끼게 한다.
[문화 유적:무덤 전설, 충혼탑]

제역(除役)마을 : 이 곳은 현 신장 1동의 대부분의 남산터를 포함하는데 그 기원은 조선 중종 시대의 최수성(원정) 선생의 정착으로 부터이다.
강 릉 최씨인 최 선생은 중종 16년에 간신의 모함으로 죽게 되었으나 중종 35년에 누명을 벗게 되었고 인종 1년에 영의정에 추대되고 시호를 문정공이라 하였다. 선조 때에는 이율곡 선생이 공의 묘가 있는 현 남산터(猿山) 부근 30여호에 묘의 수호를 명하고 근방 10리 안에 세금 및 나라의 부역을 면제하였다. 이 때부터 공이 살았던 이곳을 제역이라 하여 최정승을 받들고 기리게 했다.
[문화 유적:최정승 설화]

중앙(中央)마을 : 서정리 일대에서 중앙부에 위치하였다하여 중앙이라 하고 송탄면 당시에 생겼다.

중리(中里)마을 : 방혜동 마을에서 막곡마을 사이에 형성된 마을로 방혜동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6.25 전란 후 행정 구역 개편 시 분리되면서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리라 칭하게 되었다.

좌동(佐洞)마을 : 좌동은 좌울, 좌월(佐月)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지형의 모습이 동반월(東半月), 서반월(西半月)으로 표현됨으로서 선인들이 달月을 써서 좌울이라 했다한다. 이 마을은 제역마을의 원조인 강릉 최씨 문중의 이주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지장(地場)마을 : 지장 부락의 유래는 고려 말기(A.D.1300년 전 후)로 불악산 줄기에 지장사(地場寺)라는 절(현 송탄여중 뒷산 기슭)이 있었고 절 밑으로 부락이 형성되어 통상 지장절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선조 때의 임진왜란으로 절은 소실되고 지장부락은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왔다하며 마을의 이름은 지장절에서 지장으로 변하여 불리운다.
[문화 유적:마을 사당 1칸]

오리곡마을 : 약3-4백년 전에 이곳의 토성인 단양 우(禹)씨가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로서 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이 골짜기에 5그루의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마을이 생길 때 오류곡(五柳谷)이라 불렀다 하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발음이 어려워 점차 오리곡으로 변한 것이라 추정된다.
일설에는 마을 앞으로 큰 내가 흐르고 그 곳에 많은 오리가 모여들어 오리골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데 그 진위를 알 수 없다. 마을 촌노에 의하면 약 2-30 년전 까지도 구전되는 큰내의 다리(옛적 어떤 노인이 놓았다는)가 마을 앞 논에서 일부 드러내고(폭1m 길이2m쯤) 있었다 하는데 경지 구획으로 어디 쯤인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문화 유적:오리곡 설화, 맹정승 설화]

오좌동(梧佐洞)마을 : 이조 중엽 수성 최씨인 최자반 선생이 낙향하여 개척한 마을로 吾자를 서서 吾佐라 했는데 주변의 산세가 봉이 승천하는 형상이라 하고 봉은 오동나무 열매를 먹고 살기에 마을명을 吾에서 오동나무 梧로 고쳐 쓰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에는 또다른 봉황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마을 앞산 봉우리의 이름을 동실봉(桐實峰)이라 불렀는데 이는 오동나무 열매가 가득 열리는 봉우리를 뜻하며 마을의 형세에 관해서 생긴 명칭이라 하겠다.
[문화 유적:최자반 선생의 설화, 수성군 사당, 은행나무(둘레5.6m, 높이18m), 향나무(둘레1.6m, 높이10m)]

우곡(牛谷)마을 : 이 마을은 예부터 소가 누워있는 형이라 하여 우곡이라 했는데 일설에는 고려 때 이 마을에 진산 소씨가 정승으로 가문을 이루어 살았고 역적으로 몰려 떠나 갔으나 그 당신 소씨가 산다하여 소골이라 했다고도 한다.
[문화 유적:풀무골 전설, 김세한의 묘]

원 도일(道日) : 도일 마을은 원도일, 상하 내리로 구성 되어 있으며 조선 때 여방면 소속으로 여좌울(월)이라 하였다. 마을 전체는 아흔 아홉 골짜기로 되어 있어 인근 방여울(현 방혜동)을 합쳐서 백여골을 만들어 여방면의 형성을 주도 하였다 한다. 도일마을은 옛적 삼남 댜로변에 위치하여 주막이 형성 되었으며 감주(甘酒) 거리라 칭할 정도로 번창하였다고 하나 도일의 어원은 찾기 힘들다.

원장당(原獐堂)마을 : 산의 지세가 노루(獐)형에 산밑의 마을이라 하여 장당이라 하고 본래의 마을이라 하여 원장당이라 하여 조선 중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원 이충(二忠)마을 : 두 명의 충신이 유년기를 보낸 마을이라 하여 이충(二忠)이라 불렀으며 두 명의 충신은 1609년에 출생한 추담 오달제 선생과 1482년에 출생한 정암 조광재 선생으로서 이로 보아 마을의 연원은 약500여 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원자를 쓰는 것은 원래의 이충 마을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지금은 도시 확장으로 10여호만 남아 있는 마을이다.

칠괴(七槐)마을 : 조선 선조 때 청주 한씨 일문이 현재의 동부동 관내인 막곡 마을 앞산의 용담봉 부근에 정착하였으나 당신 삼남대로 상에 있는 주요 도로인 흰치고개에 도둑이 많이 있어서 현 불악산 줄기의 끝 부분인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공동 우물이 예부터 있었는데 그 주변에 7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으며 그 우물과 느티나무의 신령으로 7명의 장사가 태어났다고 하여 칠괴라고 하였다 한다. 현재 7그루의 느티나무는 자연히 소실되고 우물만 남아서 한 가닥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칠원(七院)마을 : 칠원 마을은 수촌, 신촌을 포함하였으나 지금은 원칠원이라 부르는데 그 유래에는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칠원의 예 명칭은 갈원, 갈왕굴이라 하였고 이는 칡(칡 갈葛)이 많아 붙여진 듯 하나 정확한 추적은 어렵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옛적 삼남대로변에 위치한 이 마을은 많은 이의 교통로 이자 쉬어 가는 주막과 파발역이 있어 번화하였고 왕이 각도 순례시 쉬어갔는데, 정확한 왕의 이름은 모르나 왕의 순례 길에 갈원에 들러 하루를 묵게 되었을 때 병이 났고 그 원인이 칡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칠원으로 고쳐 불러라고 해서 그 후 칠원이라 했는데 조선 영조(1759) 때 자료를 보면 여방면 갈원리라 칭하고 인구 120명이라 했으니 조선 말기에 명칭이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업이 발달되었다. 아주 오래 된 마을이다.
[문화 유적:옥관자정, 지명설화]

탄현(炭峴)마을 : 조선시대 말기에 진위현 탄현면으로 하여 상.하.사.오리로 구성 되어 1756년 당시 인구 603명으로 큰 마을이었다. 지금의 탄현마을은 1952년에 독립하여 예 명칭을 지니고 있다.
탄현이란 명칭의 유래는 송탄의 유래에 관련되 는데 현재 서탄면 적봉리에 숯을 굽는 가마가 있었고 탄현면은 참나무(숯 재료) 숲이 무성하여 숯 굽는 이가 많이 살면서 궁중에 숯을 납품했다고 한다. 현대에서도 한 때나마 송탄을 일컬어 숯 고개에서 유래된 쑥고개로 불렀으나 이제는 점차 잊혀지는 말이기도 하다.

하가재(下佳才)마을 : 상 가재의 아래쪽 마을로 아래 하(下)를 써 하 가재로 불리우게 되었다.

하리(下里)마을 : 하리마을은 도일마을의 범주안에서 아랫마을로 불렀기에 하리라 했다하며 도일마을이 99골짜기로 구성되어 하리 마을도 골(谷)의 형태나 특징에 따라 명칭이 많아서, 큰여의(如意)실, 작은 여의실, 원당골(院當谷), 대마(待馬)거리등이 있다.
대마거리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마을 산세가 장군의 투구와 같아서 장군이 태어난다 하여 장군이 타실 말이 기다린다하여 대마거리라 하였고, 또 숫돌고개라는 곳도 있어 장군의 칼을 갈 곳이라 하였다 한다.
고려 말에 형성 되고 석씨 이 후 소씨가 살다가 원씨가 도일리 일대에 800여년 살고 있다.
[문화 유절:원균사당, 팽나무(수령400년,둘레5.6m,높이18m), 엄나무(수령 500년)]

 
출처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207&docId=32203233&qb=7Iah7YOEIOyijOuPmQ==&enc=utf8&section=kin&rank=3&sort=0&spq=0&pid=f1m8Hwoi5T8ssZ3L5dGsss--052080&sid=S1h8lPJrWEsAAEhAC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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