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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
(
http://sejong.cha.go.kr)


우리나라의 역사는 왕의 역사입니다. 수많은 왕이 있었고 나라의 명멸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 수많은 왕 중에 가장 존경하는 이를 꼽으라면 누굴 선택하시겠습니까? 긴 고민 없이 떠오르는 한 명이 있습니다. 조선의 4번째 왕. '대왕'이라 불리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어쩌면 당연한 성군 중의 성군.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면 좋겠지만 그것은 상상 속에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세종대왕의 업적과 가치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은 있습니다. 대왕이 명을 달리하고 쉬고 있는 그곳. 세종대왕이 머물고 있는 영릉입니다. 대왕님을 만나 뵈러 경기도 여주도 떠납니다.


왕릉

 

 

영릉은 2개입니다. 3개입니다. 세종대왕이 둘로 나누어졌냐고요? 무슨 그런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을. 세종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영릉(英陵). 조선 제17대 왕인 효종과 인선왕후를 모신(寧陵)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세종대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에 영릉(英陵)으로 향합니다.

파주에도 영릉이 있습니다.. 

영조의 맏아들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일찍 죽은 효장세자를 사후 진종眞宗으로 추존하여 효순왕후와 함께 모셨는데, 파주 3릉중의 하나인 영릉永陵이라 부릅니다. - 월파님 댓글.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릉만 그런 것이 아니고 조선의 왕릉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입니다. 그러면 유네스코에서는 조선왕릉의 어떤 가치를 보고 인류의 유산으로 꼭 남겨야 한다고 했을까요?

우선은 왕릉 자체의 뛰어난 조형미를 들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도 보시겠지만, 왕릉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조형물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두 번째로는 풍수지리에 관한 것입니다. 왕릉을 아무 곳에나 두진 않았겠지요. 풍수 이론에 대한 고유한 해석과 적용도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왕릉을 만들면서 작성한 기록물들, 네 번째는 왕릉의 제례입니다.

이런 배경을 미리 생각하고 왕릉을 둘러보면 더욱 재밌는 관람이 될 것입니다.




과학

 


 

영릉 입장료는 500원입니다. 어르신들과 아이들은 아예 받지를 않더군요. 표 확인하고 들어가면, 세종대왕의 과학 장비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처럼 낯익은 것들도 있고, 낯선 이름이지만 책에서 한 번 정도는 봤음직한 것들도 있습니다. 기구들을 둘러싸고 있는 철망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한글로 둘러져 있는 것도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특히나 별자리에 관한 것들이 많더군요. 천문이라는 것이 보통의 과학으로는 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나 당시 우리나라만의 천문학을 한다는 것은 천자의 나라라 자부하는 중국과 맞짱을 뜨겠다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종대왕님. 과학의 발전을 위한 노력은 수많은 업적을 쌓았고 그 결과물은 영릉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기구 하나하나 볼 때마다 기술적인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지금 만 원짜리 뒤를 펼쳐보면 나오는 '혼천의'도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전시되어 있는 것들이 진품은 아니에요.  



전시관

 

 

과학기구들 뒤편으로 하얀색 건물은 '세종전'입니다. 세종대왕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종대왕

 

 

과학기구 맞은편으로는 세종대왕의 동상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1397년에 태어나 145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5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는 것인데 좀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1418년 22세의 나이에 즉위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한글 창제,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였고, 농업, 과학기술, 음악, 의학, 법 등을 정리하고 발전시켰습니다. 국토도 확장하였지요. 엄청난 양의 편찬사업도 했었고요. 세종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때 기획하고 다듬은 일들은 현재에도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기도 하고요.




연못

 


 

과학기구들을 둘러보고 훈민문을 지나 영릉으로 향합니다. 여느 왕릉처럼 멋들어진 소나무들이 때로는 당당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연못도 있고요. 연못에는 커다란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무척이나 신기해하고 재밌어합니다.

9살 조카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연못 앞에 물고기 먹이를 파는 자판기가 있더군요. 500원을 넣으면 먹이가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옵니다. 자판기에 있는 연락처로 문자를 넣었는데 답은 없고. 에이! 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영릉을 보고 뒤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더니 이제는 먹이가 나오네요. 종이컵 반 정도의 양으로요.

내 500원 돌리도. 




홍살문

 

 

다시 영릉으로 향합니다. 홍살문이 보이는군요. 홍살문은 붉은 화살 문이라는 뜻입니다. 능이나 궁 앞에 서 있는 것을 많이 보셨을 텐데요. 열녀문이나 유명한 서원에도 홍살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존경과 위엄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홍살문 앞으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아직 봄이라 물은 흐르지 않지만) 다리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다리의 이름은 금천교. 영릉에만 금천교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모든 왕릉에 금천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왕릉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정화하고 들어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참도

 

 

참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길을 참도라고 합니다. 정자각은 왕릉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입니다. 건물의 모양이 한자로 丁 자를 닮았기에 정자각이라고 불립니다.

영릉의 참도에 관해서 문제점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릉의 참도를 잘 보면 가운데가 올라와 있고, 양 옆으로 내려와 있습니다. 3단으로 되어 있는데요, 보통 일반적인 참도는 2단입니다. 2단의 경우 높은 곳은 신의 길, 낮은 곳은 왕의 길로 구분됩니다. 영릉은 3단이라 황제의 무덤에서나 볼 수 있는 참도라는 것이지요. 영릉을 복원할 때 오버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정자각

 

정자각 위로 올라가서 내부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정자각 안에는 제사를 지내는 시기, 방법 등을 그림과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년 양력 4월 8일은 세종, 양력 4월 28일은 소현왕후의 제향을 올립니다.




봉분

 

그런데 봉분 위로 사람들이 올라가 있네요. 보통 일반적인 왕릉은 정자각 부근에서 바라보게만 돼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왼쪽으로 보니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더군요. 나중에 문화유산해설사께서 말씀하시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왕릉의 경우 봉분 앞까지 갈 수 있도록 특별히 개방을 한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세종대왕을 더욱 가깝게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전망

 

봉분으로 올라가면서 뒤돌아 봅니다. 소나무 숲이 울창합니다. 왕릉 주변은 요즘 말로 하면 그린벨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왕의 국가에서 왕릉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겠지요. 특히나 왕릉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소나무는 십장생의 하나로 왕조의 지속적인 번영을 뜻합니다. 소나무 숲에는 곤충이 잘 들어오지 못하기에 개구리와 뱀이 살기 힘들었지요.




명당

 

봉분 앞에서 내려다봤습니다. 그런데 신기하더군요. 올라오기 전에는 바람이 쌩쌩 불더니만 봉분으로 올라오니 바람이 잔잔합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는 수시로 변하다고도 하지만 느낌이 사뭇 달랐어요. 포근한 느낌도 있고 말이죠. 명당은 명당인가 봅니다.

세종대왕이 돌아가시고 처음부터 여주 땅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세종대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소헌왕후가 헌릉(현재 서울 내곡동) 옆에 있었고, 세종도 그곳에 같이 묻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의 유지대로 헌릉 옆에 두 분을 함께 모셨는데 이곳의 터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영릉

 

당시 조선이 어떤 사회였습니까? 왕의 무덤 터가 좋지 않다는데 가만있을 리가 없지요. 당연히 천장을 계획하게 되었고, 좋은 터를 찾아 이곳저곳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난 일이 생기는군요. 

원래 지금 영릉 자리에는 대가집 문중 묘 자리였습니다. 이 집안은 아주 잘 나가는 집안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대가집에서 처음 묘를 쓸 때 자리를 봐주던 지관이 신신당부했던 말이 있었다는군요. 절대로 봉분과 비각을 하지 말라 했습니다. 하지만 잘 나가는 집안인데 봉분과 비각을 안 할 수 없었지요. 결국 봉분과 비각을 했단 말입니다.

영릉을 천장하기 위해 자리를 보러 다니던 지관이 이 대가집 묘를 발견한 것입니다. 바로 봉분과 비석을 보고서 말이죠. 지관이 보기에 천하의 명당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 대가집 묘는 다른 데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영릉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호사가들은 이곳으로 천장을 했기에 조선의 운명이 100년은 더 지속되었을 것이라 합니다.

여러분도 영릉 앞에서 좋은 기운 듬뿍 받아 보시지요. 



비석

 

영릉비입니다. 영릉에 관한 기록이 담긴 비석입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영릉을 옮긴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영조 21년(1745)에 세워졌습니다.
 

 

 


숲길

 

왕릉은 숲길을 걷는 기분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조선 제일의 성군. 아니 한반도에 역사가 시작되면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세종대왕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 뛰어난 업적은 수 백 년이 지나서도 후세들에게 큰 빛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영릉은 그 산세가 최고의 명당자리로 꼽히는 만큼 영릉을 다녀오면 건강한 기운을 담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교육의 현장으로서도 영릉은 최고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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