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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이대원 장군묘 신도비

 

저는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고 살고 있습니다. 틈틈이 평택의 명소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이대원 장군묘와 신도비입니다. 이대원 장군을 모르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저도 잘 몰랐습니다. 장군은 조선시대 왜구와 싸우다 돌아가셨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장군의 충심은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에 이대원 장군묘를 입력하고 출발합니다. 38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향합니다. 포승읍에 들어서더니 작은 산길로 들어서고 이대원 장군 묘 이정표가 보입니다. 이정표 옆 공간에 주차하고 아래로 내려갑니다. 봄의 녹음이 드리워진 나무와 인사하며 이대원 장군을 만나러 갑니다. 이대원 장군묘 및 신도비는 경기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홍살문이 보입니다. 홍살문은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등의 정면에 붉은 칠을 한 문(門)을 말합니다. 홍살문 왼쪽으로 신도비, 오른쪽으로는 충렬제가 있습니다. 안쪽으로 이대원 장군 동상이 있습니다. 먼저 신도비를 살펴봅니다. 신도비(神道碑)는 살아있을 때 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우는 비를 말합니다. 

 

 

 

 

 

 

이대원 장군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에 세워졌습니다. 훗날 영의정까지 오른 남구만이 비문을 지었습니다. 승정원 우부승지였던 김진규가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머리글자)을 쓰고 경기도관찰사 조상우가 글씨를 썼습니다. 당시 정치적, 학문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이대원 장군 신도비 건립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대원 장군을 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대원 장군 동상 뒤로는 이대원 장군의 사당인 확충사(䨥忠祠)가 있습니다. 이대원 장군은 1566년 평택시 포승읍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체구가 특별히 컸답니다. 두상은 네모나고 눈은 부엉이처럼 생겼고요. 특이한 모습에 장군의 부모님이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1583년(선조 15)에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선전관(대통령 경호실과 비슷한 임무)을 지내고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습니다. 녹도만호는 녹도라는 섬을 지키는 것입니다. 녹도는 전라남도 고흥에 있습니다. 만호라는 계급은 현재와 비교하면 연대장(대령) 정도 됩니다.  

 

 

 

 

 

1587년(선조 20) 남해안에 왜구가 침입하자 출격하여 왜구를 격파하고 적장을 붙잡았습니다. 장군의 직송상관인  심암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심암은 이대원 장군의 공을 자기 것으로 하고자 했습니다. 강직한 성품의 이대원 장군은 거절합니다. 심암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다시 왜구가 침입합니다. 심온은 이대원 장군에게 무조건적인 출전을 명령합니다. 여수 손죽도 해상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입니다. 이대원 장군은 심암에게 구원병력을 요청하지만 심암은 거절합니다. 결국 이대원 장군은 적에게 붙잡혔습니다. 장군은 항복 권유를 받았으나 거부하였고 참살당합니다. 그의 나이 22살이었습니다. 이후 이대원 장군은 병조참판(국방부 차관)에 추증되고 충신의 정문(旌門)을 내려 충절을 기리게 하였습니다. 

 

 

 

 

 

이대원 장군 사당인 확충사.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이대원 장군이 한창 전투하고 있을 때 이대원 장군의 승전보와 심암의 행패가 조정에 보고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심암을 파면하고 이대원 장군을 수군절도사로 발령을 내었습니다. 교지를 갖고 내려왔는데 이미 장군이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지금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했으면 이대원 장군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겠냐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이대원 장군을 기리는 사당, 노래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사당은 장군의 고향인 평택뿐만 아니라 장군이 생전에 머물렀던 여수, 고흥에도 있습니다. 여수는 충열사, 고흥은 쌍충사입니다. 이대원 장군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와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라남도 해안 지역에서는 이대원 장군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행사가 열리고 있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충심과 인품이 훌륭했기에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마총입니다. 충성스러운 말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이대원 장군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장군은 자신이 포로가 된 사실을 속적삼에 혈서를 써서 말에 실려 보냈습니다. 말은 고향까지 혈서를 무사히 갖고 온 다음에 죽었답니다. 말이 혼자 갖고 온 것은 아니고 사람이 함께 와서 집 앞에서 말만 들여보냈습니다. 

 

이때 적은 절명시(絶命詩)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日暮轅門渡來海(일모원문도래해) 兵孤勢乏此生哀(병고세핍차생애)

君親恩義俱無報(군친은의구무보) 恨入愁雲結不開(한입수운결불개)

 

진중에 해 저문데 바다 건너와,  외로운 군사 힘 다해 끝나는 인생 슬프다

나라와 어버이께 은혜를 갚지 못해, 원한이 구름에 엉켜 풀 길이 없네

 

 

 

 

 

 

 

 

 

 

충마총 위로 올라가면 세 기의 봉분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운데 것이 이대원 장군 묘입니다. 좌우에 있는 것은 이대원 장군 부인의 묘입니다. 이대원 장군 묘에 장군은 없습니다. 말이 갖고 온 속적삼을 묻었습니다. 말이 속적삼을 갖고 온 날이 제일(祭日)로 정했습니다. 제일이 되면 말굽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들린답니다. 

 

 

 

 

 

'이대원 장군묘 신도비'가 표시된 평택 관광안내도를 많이 봤습니다.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고 집하고도 좀 거리가 있어서 크게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찾아뵙고 이야기를 조사해 보니 좀 더 일찍 찾아서 살펴봤어야 했다는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이대원 장군묘 신도비 옆에 호랑이배꼽 막걸리 양조장도 있으니 함께 살펴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저 술 때문에 간 것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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