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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어디서 온거야?'
그러면 부모님들은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이렇게 말하죠...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에서 '다리' 가 사람의 다리가 아니고, 물길 위에 난 '다리' 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 유래라고 알려진 소수서원으로 찾아가 봅니다.
부석사에서 버스를 타고 소수서원 앞에 내립니다. 버스정류소 표지판에 '청다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청다리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2가지 유래가 있습니다. 원래 제가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정류장 옆에는 다리가 하나 있고, 제월교 라고 쓰여 있는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 다리를 청다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본래 청다리는 나무다리 였으나, 그 자리에 1966년 시멘트다리가 놓였다고 합니다.
제가 포스팅을 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기존에 제가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http://qfinder.co.kr/qfinder/index_content.jsp?kind=live&idx=1696356 에 나와 있는 이야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맞는 것일런지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첫번째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더군요.. 내심 두번째 이야기가 맞았으면 하는 바램이 살짝 드네요... ^^
그러면 소수서원이 어떤 곳인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원에는 죽계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물이 참 맑습니다.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립대학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고등교육기관이자 사액서원입니다. (사액서원이라는 것은 임금이 현판을 하사했다는 뜻입니다.)
본래의 명칭은 백운동서원이었으나 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시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 이라는 이름을 사액 받으면서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소수의 의미는 `기페지학 소이수지`에서 소수(이어서 닦게 한다)를 따온 것입니다. 사적 제 55호 입니다.
(참고 :전기환, Just go 경상도, 시공사)
소수서원에는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당간지주라는 것은 절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원래 소수서원 자리에는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죽계천 옆으로 소나무 숲 속에 취한대(翠寒臺)가 있습니다. 취한대라는 이름은 퇴계 선생이 직접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곳에서 공부하면 공부가 잘 될것 같습니다.
흰색으로 '백운동' 이라 써있고, 빨강색으로 '경'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백운동은 주세붕선생이 서원을 창건할 때 중국의 백록동서원을 참고하여 붙인 이름으로 이황선생이 각자 후 흰칠을 하였다고 합니다.
경(敬)은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敬' 이란 한 글자로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즉,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 는 뜻입니다. '경'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잡으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본뜻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숙수사를 폐찰하면서 불상들을 죽계천에 모두 버렸더니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여와서, 퇴계 이황 선생니 '敬' 자를 새겨 공경하는 뜻을 나타냈더니, 그제야 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입니다. 또는 단종 복위운동에 스러져간 선비들의 혼백을 달래려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참고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돌베개)
경렴정 입니다. 안내판에 있는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중종 38년(1543) 주세붕선생이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정자의 이름은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을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자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정자안의 초서 현판은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 고산 황기로의 글씨라고 합니다.
학구재(學求齋) 입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입니다.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3칸을 꾸몄고, 공부를 잘 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이 '工' 자 형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학구재는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동봉재라고도 하며 스승의 숙소와 나란히 세우지 않고 뒤로 물려 방바닥 높이까지 낮추어 지었다고 합니다.
강학당입니다. 보물 140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원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담는 강당으로 중종 37년(1543) 주세붕 선생이 건립하였습니다. 이곳을 거쳐간 원생은 4000여명에 달하며 퇴계 이황선생 제자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갔다고 합니다.
소수서원 옆에는 사료전시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안향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향(1243~1306)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립니다. 이 후 주자성리학을 수양과 치세의 원리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는데, 그것이 곧 조선입니다.
제가 소수서원을 처음 찾아간 것이 2001년이고, 이번에 2번째로 찾아갔습니다. 그때와 비교해볼 때 뭔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수서원 옆으로 선비촌이라는 민속촌 비스무리한것을 만들어놨고, 사료전시관을 현대식으로 크게 지으면서, 소수서원의 고즈넉함이 퇴색되버린 느낌입니다. 영주시에서 다소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행복했을 것 같기도 하구요... 서원의 분위기만 볼때말이죠... 더불어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의 뜻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어디서 온거야?'
그러면 부모님들은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이렇게 말하죠...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에서 '다리' 가 사람의 다리가 아니고, 물길 위에 난 '다리' 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 유래라고 알려진 소수서원으로 찾아가 봅니다.
부석사에서 버스를 타고 소수서원 앞에 내립니다. 버스정류소 표지판에 '청다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청다리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2가지 유래가 있습니다. 원래 제가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소수서원은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오늘날로 치면 대학교와 비슷한 규모였습니다. 그만큼 많은 유생들이 공부를 하러 왔겠죠.. 오늘날의 대학가처럼 젊은이들이 많고, 그 주변이 번성했을 것입니다.
특히나 서원에 공부하러 온 유생들을 뒷바라지 하는 종들이 살았는데, 유생들이 그 종이나 마을 처녀와 정분이 나서 연애를 했을 것이고 아이를 낳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부하러 와서 사고(?)를 쳤으니, 이를 해결 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유생들이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정을 통한 여인과 짜고 청다리 밑에 아이를 버리라 해놓고 자기가 우연히 다리를 지나다 그 아이을 주운 것처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본가에 데려가서는 자기 아이임을 감추고, 다리 밑에서 불쌍한 아이를 주웠다고 하는 것이지요...ㅎㅎ
특히나 서원에 공부하러 온 유생들을 뒷바라지 하는 종들이 살았는데, 유생들이 그 종이나 마을 처녀와 정분이 나서 연애를 했을 것이고 아이를 낳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부하러 와서 사고(?)를 쳤으니, 이를 해결 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유생들이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정을 통한 여인과 짜고 청다리 밑에 아이를 버리라 해놓고 자기가 우연히 다리를 지나다 그 아이을 주운 것처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본가에 데려가서는 자기 아이임을 감추고, 다리 밑에서 불쌍한 아이를 주웠다고 하는 것이지요...ㅎㅎ
정류장 옆에는 다리가 하나 있고, 제월교 라고 쓰여 있는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 다리를 청다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본래 청다리는 나무다리 였으나, 그 자리에 1966년 시멘트다리가 놓였다고 합니다.
제가 포스팅을 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기존에 제가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http://qfinder.co.kr/qfinder/index_content.jsp?kind=live&idx=1696356 에 나와 있는 이야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 동조했던 이 지역의 많은 선비와 가족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 어렵사리 살아 남은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데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 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순흥의 선비들이 자식들만이라도 멸족의 화를 피하게 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다리 밑에 내다 버리면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제가 위에서 소수서원의 유생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통치에 걸림돌이 된 유림들을 없애고자 유생들이 연애하여 낳은 자식들이라고 왜곡시켰다고 합니다.
그 때 어렵사리 살아 남은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데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 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순흥의 선비들이 자식들만이라도 멸족의 화를 피하게 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다리 밑에 내다 버리면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제가 위에서 소수서원의 유생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통치에 걸림돌이 된 유림들을 없애고자 유생들이 연애하여 낳은 자식들이라고 왜곡시켰다고 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맞는 것일런지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첫번째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더군요.. 내심 두번째 이야기가 맞았으면 하는 바램이 살짝 드네요... ^^
그러면 소수서원이 어떤 곳인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원에는 죽계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물이 참 맑습니다.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립대학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고등교육기관이자 사액서원입니다. (사액서원이라는 것은 임금이 현판을 하사했다는 뜻입니다.)
본래의 명칭은 백운동서원이었으나 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시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 이라는 이름을 사액 받으면서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소수의 의미는 `기페지학 소이수지`에서 소수(이어서 닦게 한다)를 따온 것입니다. 사적 제 55호 입니다.
(참고 :전기환, Just go 경상도, 시공사)
소수서원에는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당간지주라는 것은 절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원래 소수서원 자리에는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죽계천 옆으로 소나무 숲 속에 취한대(翠寒臺)가 있습니다. 취한대라는 이름은 퇴계 선생이 직접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곳에서 공부하면 공부가 잘 될것 같습니다.
흰색으로 '백운동' 이라 써있고, 빨강색으로 '경'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백운동은 주세붕선생이 서원을 창건할 때 중국의 백록동서원을 참고하여 붙인 이름으로 이황선생이 각자 후 흰칠을 하였다고 합니다.
경(敬)은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敬' 이란 한 글자로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즉,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 는 뜻입니다. '경'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잡으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본뜻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숙수사를 폐찰하면서 불상들을 죽계천에 모두 버렸더니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여와서, 퇴계 이황 선생니 '敬' 자를 새겨 공경하는 뜻을 나타냈더니, 그제야 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입니다. 또는 단종 복위운동에 스러져간 선비들의 혼백을 달래려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참고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돌베개)
경렴정 입니다. 안내판에 있는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중종 38년(1543) 주세붕선생이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정자의 이름은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을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자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정자안의 초서 현판은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 고산 황기로의 글씨라고 합니다.
학구재(學求齋) 입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입니다.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3칸을 꾸몄고, 공부를 잘 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이 '工' 자 형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학구재는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동봉재라고도 하며 스승의 숙소와 나란히 세우지 않고 뒤로 물려 방바닥 높이까지 낮추어 지었다고 합니다.
강학당입니다. 보물 140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원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담는 강당으로 중종 37년(1543) 주세붕 선생이 건립하였습니다. 이곳을 거쳐간 원생은 4000여명에 달하며 퇴계 이황선생 제자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갔다고 합니다.
소수서원 옆에는 사료전시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안향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향(1243~1306)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립니다. 이 후 주자성리학을 수양과 치세의 원리로 삼은 성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는데, 그것이 곧 조선입니다.
제가 소수서원을 처음 찾아간 것이 2001년이고, 이번에 2번째로 찾아갔습니다. 그때와 비교해볼 때 뭔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수서원 옆으로 선비촌이라는 민속촌 비스무리한것을 만들어놨고, 사료전시관을 현대식으로 크게 지으면서, 소수서원의 고즈넉함이 퇴색되버린 느낌입니다. 영주시에서 다소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행복했을 것 같기도 하구요... 서원의 분위기만 볼때말이죠... 더불어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의 뜻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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